살수대첩 ( 고구려-수전쟁)
살수 대첩은 612년 1월 중국 수나라의 제2대 황제인 수 양제는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하여 11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의 요동성과 여러 성으로 진격하였다. 수나라는 진군 속도가 굉장히 빨랐지만, 고구려군의 저항으로 수나라군은 요하를 건너는 데만 두 달이 걸렸다. 결국 수양제는 수군과 육군으로 편성된 30만 명의 별동대를 조직하였다. 요하를 건너 요동성 공성전을 시작했지만 고전하고 있을 무렵, 수나라의 좌익위대장군 내호아는 대동강에 상륙하였고 이때 고구려의 재상이 군사들을 이끌고 상륙한 수나라군을 막으러 갔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어 내호아는 평양성을 공격하려 했으나 부총관의 주법상의 제지하였지만 단독으로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영양왕의 이복동생 고건무가 결사대를 이끌고 출동하여 내호아의 군사를 크게 물리쳤다.
수나라의 군은 처음에는 100일 치 식량, 방패와 갑옷, 무기 등 물자를 가지고 시작하였으나 병사들은 3섬(50kg) 이상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였다. 군수품을 버리고 가는 자는 목을 베겠다는 군령이 떨어졌지만 병사들은 구덩이를 파묻는 행위를 하기도 하였다. 결국 별동대는 행군 도중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수나라군은 평양성을 함락시키기 위하여 압록강으로 집결하였다. 영양왕은 을지문덕에게 거짓으로 항복시키도록 하여 수나라군의 내부 사정을 알려고 하였다. 평양성을 건너기 전 수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고구려왕이나 을지문덕이 찾아오는 기회가 있음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비밀 지령을 받은 상태였다. 그리하여 우중문은 을지문덕이 항복하자 지령에 따라 을지문덕을 생포하려 했으나, 수나라의 참군 유사룡이 사신을 함부로 해치면 안 된다 하며 우중문을 말렸고 할 수 없이 보내주었다. 그러나 이내 후회하며 을지문덕을 다시 오라고 하였지만 그는 압록수를 건넌 후였다.
그 후 계속 나아갈 것을 주장한 우중문과 군량이 다 떨어져 돌아가자는 우문술의 의견 대립이 있었지만, 우중문의 설득에 우문술은 동의하며 평양성을 향해 진격하였다. 무사히 돌아간 을지문덕은 여러 번 전투를 벌이고 거짓으로 도망치기를 반복하여 수나라군을 피곤하게 만들었던 을지문덕의 유도작전이었다.
이렇게 수나라군이 평양성 근처까지 도착하자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시 한 편을 보내는데 이것이 <여수장우중문시>이다.
神策究天文 신책구천문 / 귀신같은 책략은 천문을 다하였고
妙算窮地理 묘산궁지리 / 묘한 지혜는 땅의 지리를 다하였도다
戰勝功旣高 전승공기고 /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 지족원운지 / 만족함을 알고 이만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이어 우중문은 답신을 보내였고, 을지문덕은 이에 대한 답신을 보내는데 “ 수나라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간다면 왕을 모시고 반드시 항복하겠다”라고 하였고 우중문은 퇴각을 결심하고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고구려군은 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수나라군은 간신히 살수에 도착하며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고구려군이 다시 나타나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처음 평양성을 향해 진격했던 30만 명의 군사들 중 압록강까지 살아 돌아가자는 고작 2,700명뿐이었다고 한다.
612년 7월 을지문덕은 수나라의 군을 크게 격파하며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양제는 크게 분노하며 우문술 등 이들을 쇠사슬로 묶어 돌아갔고, 이후 을지문덕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이유로 유자룡은 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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