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에서 1955년 11월 1일 ~ 1975년 4월 30일까지 벌어졌던 전쟁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식민정책을 버리지 못한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점령하기 위해 북베트남을 공격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벌어졌는데 베트남이 승리하게 된다. 1954년 휴전협정을 맺게 되었지만 이때 제네바 협약에 따라 베트남은 공산주의 세력인 북베트남과 자본주의 세력인 남베트남으로 분단된다.
1954년 5월 미국은 남베트남에 강력한 반공정권을 세우기 위해 지원을 발표하며 1955년 1월 미국의 지원으로 남베트남에는 ‘응오딘지엠’이 초대 총통으로 올랐고 북베트남은 호찌민 정부가 있었다. 하지만 응오딘지엠은 공산주의 정책과 전통적으로 불교국가인 베트남에서 친 가톨릭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에 틱꽝득 스님의 분신자살사건 등 곳곳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1963년 미국은 쿠데타 계획을 착수하여 응오딘지엠은 총살을 당한다.
응오딘지엠 이후 정권을 잡은 지도자들도 남베트남의 세력을 하나로 통합하지 못하였고 이전보다 더한 부정부패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1960년 남베트남에는 공산주의 조직인 베트콩이 생겼으며 북베트남은 호치민 루트를 통하여 지원을 하였다.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전쟁)
1964년 8월, 북베트남 근처 통킹만에서 북베트남 해군이 미국의 구축함인 USS 매덕스함을 공격하였다(통킹만 사건 당시 미국의 조작극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통킹만 사건으로 미국은 곧장 미 지상군 투입을 명령하였고, 미국은 1965년에서 1968년까지 약 3년간 북베트남에 약 100만 톤에 이르는 폭격을 퍼부었다. 미국은 한국, 호주, 뉴질랜드, 핀란드에도 파병을 요청하였고 베트남전쟁에서 미군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투입한 나라가 한국이었다.
정글 아래에 위치한 약 250km의 구찌 땅굴은 베트콩들의 근거지였고 이 구찌 땅굴에서 밤이 되면 튀어나와 미군을 습격하였고 이 땅굴에 중간중간에는 회의실, 식당들도 있었다고 한다. 베트남전쟁은 수많은 학살이 있었는데 여성과 아동 등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 또한 미군은 베트콩이 있는 정글을 향해 맹독 물질 중 하나인 고엽제를 뿌려 많은 사람들과 생물들은 고엽제 후유증인 선천적 기형과 각종 질병을 앓기도 하였다.
베트남은 구정에 잠시 휴전하는 관습이 있어 쉬고 있는 그때 북베트남은 약속을 깨고 1968년 기습공격을 하게 된다. 초기에는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과 미국 사령부 본부가 잠시 공격을 받기도 하였고 기습공격을 받은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북베트남의 공격에 밀렸지만, 결국 구정 대공세로 인하여 베트콩들은 큰 피해를 입었고 결국 북베트남은 미군에 패배하고 만다.
1969년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 리차드 닉슨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미국은 단계적으로 철수하겠다고 하였다. 1973년 미국, 남베트남, 북베트남, 베트콩 대표가 모여 파리 평화 협정을 체결하며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을 공식적으로 종결하였다.
그러나 미군 철수 이후인 1975년 북베트남은 다시 남베트남을 공격하였고, 한 달 만에 사이공은 함락되었다. 결국 북베트남이 승리하게 되면서 베트남은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일된다.
베트남전쟁 이후
1976년 7월, 베트남은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일되면서 공산주의로 인하여 노동 수용소로 끌려가야만 했다. 노동 수용소로 끌려간 사람들 중 16만 명이 죽고 10만 명에서 20만 명 사이의 남베트남들이 처형당하기도 하였다.
300만 명이넘는 사람들이 나룻배를 타고 나라를 탈출하려고 시도하였는데 이들를 보트피플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50만 명은사망하게 된다. 또한 도미노현상으로 인하여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공산주의 국가가 되고 캄보디아에서는 공산주의자 폴 포트가 대규모로 캄보디아인을 학살한 사건인 킬링 필드 사건이 발생하게 되다. 또한 베트남 전쟁으로 인하여 참전했던 많은 미군과 한국군은 수색 섬멸 작전 중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함으로써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