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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일제강점기

by 나시리야 2024.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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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대한제국은 1897년 ~ 1910년까지 존속한 제국이다. 1897년 고종은 환궁하였고,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선포하였다. 

대한제국은 옛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것을 참고한다는 뜻인 광무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집권층과 열강들의 간섭을 받아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수구파의 저항을 받아 해체되었다.  

 

삼국간섭 이후 지속적인 남하 정책을 벌이는 러시아와 일본이 대립이 심화되면서 러일전쟁이 발생하게 되는데 일본이 승리를 거두게 된다. 1904년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의 국외중립을 선언하였지만, 일본은 대한제국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한일의정서는 대한제국의 군사적 요지와 시설을  점령하고 정치적,외교 행사에 간섭한다는 내용이었다.또한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게 되고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을 하였다. 이어서 1905년 일본은 고종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여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성에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임명하여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이후 고종 황제는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하여 미국의 선교사인 헐버트를 미국으로 보내 지원을 요청하고 1907년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보내 국제적 지지를 호소하였지만 일본의 간섭과 서양의 외면으로 실패하게 되고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은 고종을 강제 퇴위하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한편 을사늑약 체결에 대해 반발도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나철과 오기호 등은 친일파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적암살단을 조직하였고 안중근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등 여러 노력들을 하였다. 

 

일본은 1907년 통감부의 권한을 더 강화하기 위하여 한일 신협약(정미 7 조약)을 강제로 체결해 대한제국 요직에 일본인을 배치하여 대한 제국 내정에 간섭하는 등 차관정치를 실시하였으며, 부수 기밀 각서를 통해 군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또한 1909년 기유각서를 통해 대한제국의 사법권, 1910년 경찰권 위탁 각서를 통해 경찰권까지 강탈하였다. 

 

1910년 8월 한일 병합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며 대한 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은 조선으로 불리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는 일본이 한반도를 강제로 점령하여 35년간 긴 시간 동안 식민지로 삼은 시기이다.

 

1910년대

 

일제는 조선인들을 통치하기 위해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기본권을 박탈하고 저항 세력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등 무단통치가 시작된다. 또한 군인이 경찰이 되어 통제하는 헌병경찰통치를 하게 되는데 즉결 처분권을 부여하여 조선인을 태형을 처하기도 하였다. 한편 경제적인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토지조사사업을 공포하여 조선 농민들의 땅을 다 수탈하기도 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만주,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운동 기지인 신흥무관학교를 건설하게 된다. 훗날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에서 큰 활약을 하게 된다. 

1914년에 일어났던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에 끝이 난다. 미국 대통령 윌슨은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라는 민족 자결주의 발표를 하면서 조선인들에게 독립에 대한 열망과 강한 의지를 주었다. 

 

1919년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이 사망하게 되고 조선인들은 격앙되어 10년간 받은 통치에 대한 분노를 하게 된다. 그렇게 역사상 최대 규모인 3·1 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3·1 운동으로 인해 가혹한 고문과 많은 희생들이 있었지만 독립에 대한 의지를 세계에 널리 알리게 되었고 독립운동가들은 더 활발한 독립활동을 이어나갔다.

1919년 4월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1920년대

 

일제는 무단통치만으로는 조선을 지배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조선인들을 학살한 사실이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여론이 안 좋아지게 된다.

1920년대에 들어서는 조선의 문화를 존중하는 척 문화통치를 하게 된다. 조선태형령이 폐지되고 헌병경찰통치 대신 일반 경찰제도를 도입한다. 그리고 언론출간의 자유를 일부 주고 이때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통치는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고 친일파를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때 민족주의세력 내에서 자치론을 주장하며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친일파로 돌아서기도 하였다. 물론 끝까지 저항한 민족주의자들이 더 많았고 이들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라고 부른다.

국내에서 사회주의가 크게 퍼지게 되는데 많은 파업을 실시하며 독립활동을 하게 된다. 일제는 그들을 탄압하기 위해 치안유지법이라는 정책을 내놓는다. 이때 비타협적 만족주의 세력들과 사회주의 세력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진 것이 일제 강점기의 가장 큰 민족단체 신간회이다. 신간회는 많은 독립운동을 하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 지원을 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외교론에 큰 힘을 주었고 이때 외교론자인 이승만이 1대 임시정부 대통령이 된다. 하지만 이승만은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보낸 위임통치청원서가 알려지면서 대통령자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1930년대 ~ 1940년대

 

1929년 전 세계적으로 경제 대공황이 일어나면서 일제는 1930년 만주를 침략하여 만주사변을 일으키게 된다. 그렇게 중국의 만주는 일본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때 김구는 같은 반일감정을 가지고 있는 중국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비밀 단체인 한일 애국단을 수립하게 된다. 

한일 애국단의 이봉창은 일본의 일왕을 암살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1932년 1월 도쿄 관병식에서 일왕에게 수류탄 한 개를 투척하는데 실패하게 되고 사형에 처하게 된다. 

1932년 4월 윤봉길은 도시락과 물통으로 위장한 폭탄을 준비하게 되고 일본의 여러 인사들을 사망, 다치게 하는 등 성공적이었다. 윤봉길은 그 자리에서 붙잡혀 사형을 집행당한다. 이 계기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도 끌어낼 수 있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는데 길어진 전쟁으로 물자와 인력이 부족해지게 되는데 일본은 조선인들을 이용하기 위해 황국신민화 정책을 실시한다.

우선 모든 학교 이름을 황국신민학교를 의미하는 국민학교로 명칭을 바꾸고, 학생들은 황국신민서사를 외우며 아침마다 일왕이 있는 도쿄를 향해 절을 했어야 했다. 또한 이름을 창 씨 개명으로 일본식으로 모두 바뀌게 되고 일본어를 사용했어야만 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게 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게 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의 지원을 받아 1940 충칭에 자리잡게 되고 임시정부는 1945 미국의 도움을 받아 독립준비를 하였다. 1945 일본은 미국에게 항복을 하며 1945 8 15 일제강점기는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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